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빌라이 칸 (문단 편집) == 개요 == >'''"[[아담]]에서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나타난 어떤 사람보다도 많은 지역과 재물, 영토를 소유한 사람."''' >---- >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 사실상 통합 몽골 제국의 마지막 [[대칸]][* 내전 승리로 대칸 즉위를 공인받았다고는 하지만 친(親) [[아리크부카]] 세력이 이탈했고 이후의 대칸 즉위가 내전으로 얼룩지는 선례를 만들었기에 통일 몽골 제국의 마지막 대칸은 몽케 칸이라는 시각이 제법 큰 편.]으로 이후에는 울루스들의 독자적 세력 형성이 시작된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칸호]]는 세첸 칸, 휘는 보르지긴 쿠빌라이이다.[* [[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 ᠬᠤᠪᠢᠯᠠᠶ(Боржигин Хубилай, Borǰigin Khubilai)[br][[중국어]]: 孛兒只斤 忽必烈[br][[한국어]]: 패아지근 홀필렬 혹은 흘필렬][* 엄밀히 따지면 쿠빌라이는 칸호가 아닌 휘(이름)이기 때문에 쿠빌라이 칸이라는 이름은 다소 어색한 감이 없지않아 있다. 조부인 칭기즈 칸으로 치면 '테무진 칸'이라고 칭해지는 격이다. 상술된 [[세첸 칸]]이 올바른 표현이다. 근데 사실 칭기즈칸이 특수케이스일뿐 칭기즈칸만 빼고 쿠빌라이 선대의 대칸들은 죄다 휘를 칸호로 썼다. 우구데이는 우구데이 칸, 귀위크는 귀위크 칸, 몽케는 몽케 칸이었다. 쿠빌라이만 칸호를 만들어 바꾼 것. 선대들의 영향이 있다보니 쿠빌라이도 쿠빌라이 칸이라 부르게 되는 것인데, 쿠빌라이는 중국을 정복했다보니 중국식 피휘의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칸호를 따로 만들었다. ] 휘의 어원은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고니(조류)|백조]]를 뜻하는 튀르크어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자'라는 중세 몽골어 어휘가 어원이라는 설도 있다.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칭기즈 칸의 막내적자[* 적자가 4명이므로 넷째 아들이다.]인 [[툴루이]]의 4남이자 전대 대칸이었던 [[몽케 칸]]의 친동생이다. 그리고 [[제국대장공주]]의 아버지이며 [[고려]] [[원종(고려)|원종]]의 사돈, [[충렬왕]]의 장인, [[충선왕]]의 외할아버지, [[계국대장공주]]와 [[복국장공주]]의 증조할아버지, [[조국장공주]]의 고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또한 [[덕녕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4세손이 된다.[* 쿠빌라이 칸의 7남 서평왕(西平王) 오그룩치의 가계] 1260년, 대칸의 자리에 올라 대칸의 자리를 두고 동생 [[아리크부카]]와 내전을 벌여 1264년에 이겼다. 그러나 내전 이후 친(親) [[아리크부카]] 세력[* [[킵차크 칸국|킵차크 울루스]], [[차가타이 칸국|차가타이 울루스]] 등.]이 떨어져 나가서 쿠빌라이의 직접적인 통치권은 중국과 [[몽골 초원]]에만 머물렀다.[* 물론 대칸으로서 명목상의 영향력은 [[몽골 제국]] 전체에 미치기는 했다. 하지만 서쪽 끝의 킵차크 울루스까지 가면 사실상 영향력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쿠빌라이 칸의 치세에 [[몽골족]]의 전체 판도는 역사상 최대 규모에 달했다. 무려 전 세계 인간이 거주 가능한 지역의 1/5을 차지했다. 그리고 몽골 제국의 대규모 원정은 쿠빌라이 칸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동시대의 [[마르코 폴로]] 덕분에 [[칭기즈 칸]] 못지 않게 서구 세계가 잘 아는 몽골 제국의 군주이기도 하다. [[몽골]] [[울란바토르]]의 [[수흐바타르 광장]]에는 [[오고타이 칸]]과 함께 앉아있는 [[칭기즈 칸]]의 동상을 양 옆에서 호위하는 모습으로 쿠빌라이의 동상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